게임 기획 실무: 아트 팀과의 협업 유의점 3가지 (기획 의도, 레퍼런스 시안, 수정 요청)
안녕하세요. '호랭이 물어갈 기획놈들' 입니다.
지난 기획 실무 시리즈에서 클라이언트, 서버, QA 파트와의 피 튀기는 전쟁을 다루었지만, 정작 게임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아트 파트(원화,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이펙트, UI/UX)'와의 협업 이야기는 깊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전 글들을 보시고 "아트는 그냥 기획서 대충 넘겨도 알아서 그려주나? 그냥 '고풍스러운 빨간색'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오해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 아트 파트의 비중을 줄였던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보통 신입이나 주니어 기획자가 어설픈 발주서를 들고 가도, 아트 파트의 실무자분들이 기획서의 빈틈을 알아서 찰떡같이 채워주며 상당히 관대하고 원만하게 작업을 진행해 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렇게 아트 팀에서 원만하게 기획의 구멍을 메워주다 보니, 신입/주니어 기획자들은 어느 순간 아트 작업자들을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독심술사'로 착각하는 오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17년 차 현업 기획자의 시선에서, 이런 치명적인 착각을 부수고 아트 팀과 소통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3가지 실무 유의점'을 뼈 때리게 해부해 드립니다.
'기획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하십시오
연출이나 UI가 포함된 기획서를 쓸 때, 신입이나 주니어 기획자들이 가장 흔하게 저지르는 1차원적인 실수가 있습니다. 바로 단순한 텍스트 나열로 '외형'만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핵심 BM인 '가챠(뽑기)' 화면 연출을 기획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흔히들 이런 식으로 발주서를 씁니다.
"확인 버튼을 누르면 불빛이 번쩍거리고, 주먹으로 내려치기 직전의 괴수가 나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상태로 제작해 주세요! 주먹은 꽉 쥐고 있어야 합니다. 아, 그리고 우측 상단에 SKIP 버튼도 넣어주세요."
이건 기획서가 아닙니다. 그냥 1차원적인 외형 묘사일 뿐입니다.
아트 팀이 진짜로 궁금해하고, 작업의 퀄리티를 한 차원 높이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 가챠 연출 화면이 "왜(Why) 이렇게 제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기획 의도'입니다.
만약 저라면, 기획서를 아래와 같이 작성합니다.
|
|
| <그림 1. 뽑기 버튼 클릭 후 연출 시안> |
[기획 의도]
"캐릭터 뽑기"라는 게임 내 핵심 BM 연출 구간이므로, 유저들에게 우리 게임만의 명확한 아이덴티티와 강렬한 시각적 각인이 필요함!
[연출 순서 및 타이밍]
- 뽑기 버튼 클릭
- 디바이스 전체 화면 암전 처리
- 주인공이 괴수로 변신하는 연출 진행 (소요 시간: 1.5초)
- 주먹을 꽉 쥐고 내지르기 직전의 텐션 유지 (소요 시간: 0.5초)
- 괴수의 눈빛 색상으로 결과 암시: 파란색(일반 등급), 보라색(레어 등급) 출력 (소요 시간: 0.5초)
- 주먹을 내지르며 대지가 강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쉐이킹 연출 (소요 시간: 1초)
- 최종 획득 UI 화면 출력
뽑기 연출 작업의 경우, 이런 방식으로 명확한 '기획 의도'와 프레임 단위의 '연출 순서(타이밍)'를 전달해야 합니다.
블로그 포스팅이라 이해하기 쉽게 간략한 예시로 줄였지만, 실제 현업에서 기획서를 작성할 때는 플로우 차트를 포함해 무려 8장 분량으로 쪼개서, 핵심 이미지와 정확한 연출 시간 등 구체적인 스펙을 꽉꽉 담아냅니다.
이렇게 기획 의도와 스펙을 완벽하게 세팅해서 넘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실력이 출중한 아트 작업자들은 기획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기획자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훨씬 더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시각적 디테일을 역으로 제안해 줍니다.
이때 아트 파트의 피드백에 귀를 기울이면, 기획자 본인도 새로운 시각으로 게임 연출을 바라보는 레벨 업을 경험하게 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기획자는 단순히 그림의 겉모습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트 팀에게 명확한 '기획 의도'와 '논리'를 글과 그림으로 설계하여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레퍼런스 시안'은 추상적 언어 금지
앞서 말씀드렸듯, 단순한 텍스트 나열만으로 아트 팀과 협업을 진행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특히 기획서에 '타격감 있게', '세련되게', '고풍스러운 빨간색' 같은 뜬구름 잡는 언어를 쓰는 것은 최악입니다. 아트 작업자분들이나 파트장님들이 뒷목 잡고 쓰러질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전형적인 금기어입니다.
'타격감', '세련되다', '고풍스럽다' 같은 추상적인 형용사는 사람마다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가 180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도대체 '고풍스러운 빨간색'이 뭐냐?"라고 묻는 아트 팀원에게, 건방지게 스포이드로 RGB 값을 콕콕 찍어가며 "이 '못된 핑크' 베이스 색상에 R 값을 몇 정도 더 올리시면 됩니다"라며 어처구니없는 기 싸움을 거는 신입 기획자도 있습니다.
이건 진짜 복날 삼계탕 마냥 펄펄 끓는 인삼 육수통에 제 발로 풍덩 뛰어드는 자살 행위입니다. 절대 그런 오만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안 됩니다.
기획자가 건방지게 RGB 값을 찍어주는 짓을 선례로 남겼다간, 앞으로 UI에 출력되는 모든 자잘한 버튼이나 약간의 미사여구가 들어간 기획서를 볼 때마다 아트 팀원들이 당신 자리로 찾아와 영혼 없이 물어볼 것입니다.
"기획자님, 그래서 이 버튼의 정확한 RGB 값이 얼마인가요?"
결국 아트 팀에 기획서를 넘길 때는 철저하게 '시각적인 레퍼런스(Reference)'를 동반해야 합니다.
구글링으로 찾은 연출 이미지, 타겟으로 삼은 경쟁 게임의 스크린샷, 혹은 유튜브 영상 링크를 반드시 첨부하십시오.
"타격감은 A 게임 영상의 1분 15초에 나오는 폭발 이펙트의 화면 흔들림(카메라 쉐이킹) 정도를 원하고, 전체적인 색감의 톤 앤 매너는 B 게임의 스크린샷처럼 채도가 낮은 다크 판타지 느낌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명확하게 시각 자료를 짚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말이 조금 길어졌습니다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내 머릿속의 뭉뚱그려진 이미지를 텍스트가 아닌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시안'으로 번역해서 전달해 주는 것.
이것이 불필요한 감정싸움과 재작업(리테이크)을 막고, 개발 일정 지연을 방지하는 기획자의 가장 중요한 역량입니다.
'수정 요청'은 취향이 아닌 '논리'와 '존중'으로 피드백하라
아트 결과물이 기획서대로 나왔는지 확인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은 매우 예민한 작업입니다. 여기서 초보 기획자들은 엄청난 금기어를 내뱉고 맙니다.
"음...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파란색보다는 빨간색이 더 예쁜 것 같은데요?"
"뭔가 느낌이 안 사는데, 일단 다른 시안으로 몇 개만 더 뽑아봐 주실 수 있나요?"
최악입니다. 기획자는 본인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느낌'으로 아트 결과물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수정 요청(피드백)은 철저하게 '기획적 논리와 유저의 사용성'에 근거해야 합니다.
[좋은 피드백의 예시]
"배경이 붉은 톤인데 몬스터도 붉은색이라, 모바일 화면에서는 유저가 몬스터를 인지하기(가시성) 너무 어렵습니다. 몬스터를 보색 계열로 수정하거나, 외곽선(아웃라인) 처리를 1.5픽셀(Pixel) 두께의 검은색 선으로 강하게 잡아주셔야 전투의 보는 맛이 살아납니다."
"이 UI 버튼은 하루에 50번 이상 눌러야 하는 핵심 버튼인데, 현재 디자인은 장식 요소가 너무 많아 실제 터치 영역이 좁아졌습니다. 장식을 덜어내고 터치 영역을 넓혀주십시오."
이처럼 '내 맘에 안 든다'가 아니라, '우리 게임의 룰과 유저 편의성을 위해 이 부분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명확한 기획적 근거를 대야 합니다. 그래야 아트 전문가들도 감정 상하지 않고 기획자의 피드백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절대 해선 안 될 치명적인 망언]
여기에 추가로, 기획자분들이 절대 입에 담아선 안 될 최악의 멘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거 간단한 건데, 며칠 안에 수정 가능하죠?"
총괄 PD조차도 감히 함부로 내뱉기 힘든 말입니다. 기획자의 눈에는 그저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버튼 하나'일지 몰라도, 아트 팀은 그 작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화면의 밸런스, 톤 앤 매너, 다른 UI와의 조화 등 수많은 사례와 변수를 꼼꼼하게 계산하고 체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치열한 과정을 무시한 채 "간단한 버튼"이라 단정 짓고 저런 무례한 말로 일정을 후려치면? 앞으로 남은 개발 기간 내내 가장 일하기 힘들어지는 사람은 바로 '기획자 당신'이 될 것입니다.
아트 팀은 기획자의 메마른 엑셀 시트와 상상 속의 이미지를, 유저분들이 실제 눈으로 보고 체감하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실물'로 빚어내 주는 최고의 마법사들입니다.
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명확하고 논리적인 문서로 소통하는 훌륭한 기획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