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획 실무: 17년 차 기획자가 3년 차의 '나'에게 보내는 반성문

 

17년차 기획자가 바라보는 3년차에 나
<그림 1. 아이고 미치겠네>

안녕하세요. '호랭이 물어갈 기획놈들' 입니다.

오늘은 엑셀 함수나 밸런스 공식 같은 딱딱한 실무 이야기에서 잠시 벗어나, 조금 개인적이고 뼈아픈 회고록을 적어볼까 합니다. 

16년을 넘어 17년 차에 접어든 현재의 제가, 이제 막 짬을 먹기 시작했던 2~3년 차 주니어 시절의 '나'를 앞에 앉혀두고 꼭 해주고 싶은 3가지 이야기입니다. 

기획자를 꿈꾸는 지망생들이나, 지금 실무 현장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주니어 분들에게도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1.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말자


그 시절 넌 한국 게임 시장의 압도적인 흐름에 취해 "기획자라면 무조건 MMORPG를 만들어야 진짜 기획자다"라는 강박에 빠져 있었지.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의 내가 장담하건대, 특정 장르 하나에 너의 가능성과 시야를 스스로 가둘 필요는 전혀 없다. 

시장의 트렌드는 언제든 변하고, 기획자의 진짜 무기는 특정 장르의 지식이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는 탄탄한 논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장르라는 껍데기에 집착하기보다, 어떤 장르가 주어져도 유저를 몰입시킬 수 있는 보상 루프와 밸런스 구조를 설계하는 기초 체력을 길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MMORPG 신규 개발 프로젝트에 합류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명심해야 할 절대적인 룰이 있다. 

그 분야의 '압도적 1등 게임'과 '네가 입사하려는 회사의 대표작'은 뼈와 살이 분리될 정도로 빠삭하게 플레이하고 분석해야만 한다. 

단순히 최고 레벨을 찍어봤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게임의 인게임 재화 흐름은 어떤 수식으로 통제되는지, 유저들의 성장에 따른 허들(스트레스 구간)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길드와 공성전의 보상 밸런스가 유저 이탈률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구조를 밑바닥까지 뜯어봐야 한다. 

수박 겉핥기식의 얕은 플레이 경험만으로는 실무 면접관들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압박 질문을 절대 견뎌낼 수 없다. 장르에 매몰되지는 말되, 일단 선택했다면 그 장르의 '심연'까지 파고들어라. 

그것이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2. 면접관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포장하자


난 아직도 네가 그 중요한 면접장에서 했던 대답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이불을 걷어차곤 한다. 

"이 게임의 화려한 그래픽과 웅장한 스토리가 맘에 들어서 지원했습니다." 

그 긴장되는 자리에서 왜 1차원적인 '유저의 감상평'을 늘어놓았을까? 

면접관은 네가 우리 게임을 얼마나 재밌게 했는지가 아니라, 그 재미의 본질을 '기획자의 언어'로 해부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 

넌 원래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아니 그렇게 준비해서 갔잖아...)

"단순히 텍스트로 읽히는 스토리가 아니라, 이벤트 던전 내에서 특정 석판 조각을 획득하면 주인공 이외의 NPC 캐릭터로 직접 빙의하는 시스템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저가 직접 그 캐릭터가 되어 움직이며 '얘가 왜 이런 행동을 했고, 무엇 때문에 이 비극이 벌어졌는지' 사건의 인과관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그 치밀한 내러티브 설계! PC MMORPG임에도 불구하고 콘솔 게임 이상의 스토리 흡입력과 몰입도를 느꼈고, 저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아까 말씀드렸던 플레이 하며 추가하고 싶은 시스템 등을 넣으며 스텝롤에 이름을 넣고 싶습니다."

네가 유저로서 진짜로 느꼈던 그 날카롭고 기획적인 감각을, 단지 긴장했다는 이유로 투박하게 뱉어버린 그날의 실수는 평생의 오답 노트다. 

면접관은 너의 취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너의 '설계 능력'을 묻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네 머릿속에 있는 훌륭한 인사이트를 '시스템과 기획의 언어'로 정교하게 포장하는 법을 반드시 연습해야 한다. 

그것이 네 가치를 10배 이상 올려줄 유일한 방법이다.


3. 한계를 긋지 말고 더 깊게 파고들자


주변에서 널 보고 일머리가 좋다고, 일 참 잘한다고 칭찬할 때 절대 착각하지 마라. 

네가 기획을 완벽하게 마스터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눈치가 빨라 새로운 환경에 금방 적응하고 당장 눈앞에 떨어진 이슈를 곧잘 해결하기 때문에 듣는 '달콤한 독'일 뿐이다. 

그 '적당한 잘함'에 안주하고 스스로 너의 한계를 그어버리는 순간, 기획자로서의 진짜 성장은 거기서 멈춘다. 

그저 일을 쳐내는 기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대체 불가능한 설계자가 될 것인가는 네 태도에 달려 있다.


어떤 시스템을 기획하든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반드시 뒤돌아서서 그 과정을 뼈저리게 복기해야 한다. 17년 차가 된 내가 매일 밤잠을 줄여가며 이 블로그에 미친 듯이 글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파편화된 경험과 짬바이브에만 의지하는 것을 넘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실무의 흔적들을 텍스트로 명확히 정리하여 '완벽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때 네가 한계를 긋지 않고 더 깊게 파고들어 기록을 남겼다면, 지금의 나는 훨씬 더 풍부한 데이터 위에서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든다. 

기획자에게 기록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미래의 나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생전 처음 보는 개발 툴이 주어지든, 감당하기 힘든 업무가 떨어지든 겁내지 않고 밤을 새워가며 부딪혔던 그 무식한 '실행력'. 

네가 그 밤들을 하얗게 지새우며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의 한계를 부숴온 덕분에, 17년 차인 내가 아직도 이 치열한 바닥에서 게임밥 먹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꺾이지 않았던 투지와 근성만큼은 진심으로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생 많았다, 그 시절의 나야.